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 독립운동 (문단 편집) ==== 국외 무장 투쟁 ==== 1920년 [[홍범도]]가 이끄는 [[대한독립군]]과 기타 독립군 연합 부대들이 [[봉오동 전투]]에서 [[일본군]]에게 최초로 승전보를 울림으로써 만주 무장 투쟁의 서막을 열었다. 패배한 일본군은 [[만주]]의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간도 조선인 토벌 계획을 세우고 [[훈춘 사건]]을 조작하는 등의 준비 끝에 간도 독립군 일소를 위한 대규모 군대를 만주에 파병하였다. 이에 [[김좌진]]의 [[북로 군정서]]와 [[홍범도]]의 [[대한독립군]], [[천주교]] 계열의 의민단과 기타 독립군 부대들은 퇴로 확보를 위해 연합하여 청산리 일대에서 6일 동안 10여차례의 전투 끝에 대승리를 거두게 됐다.[* 이 '대승리를 거두게 된다'는 부분에는 논란이 있다.] ([[청산리대첩]], 1920). 청산리 전투의 결과와는 별개로 일본군은 간도 조선인 토벌 계획의 일환으로 [[간도]]에서 [[학살]]을 자행하여 수많은 조선인들이 죽임을 당했다([[간도참변]]). 이후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에게 밀려났음을 인정하고 일단 해산하고 난 뒤 추후 재결집을 위해 러시아로 이동하였는데, 그 과정에서 독립군 부대 간의 지휘권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[[자유시 참변]]을 겪게 됐다. 자세한 설명은 해당 문서 참조. 이후 남은 서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러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통의부(統義府, 혹은 대한통의부)를 조직하였다(1922). 통의부는 서간도 최초의 통합 독립군 단체인 통군부를 확대하여 결성한 것으로 서간도 교육, 산업 및 지역 자치활동과 행정 무장투쟁활동을 전개하였다. 그러나 다시 분열되어 의군부, 참의부(1923), 정의부(1924), 신민부(1925) 등으로 조직이 나눠졌다. 이들은 [[미쓰야 협정]](1925)으로 해체되었으나 이후 혁신의회(1928)와 국민부(1929)로 재편되었다. 남만주의 국민부는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고 군사 조직으로 [[조선혁명군]]을 조직하였으며, 북만주의 혁신 의회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군사 조직으로 [[한국독립군]]을 조직하였다. [[조선혁명군]]과 [[한국독립군]]은 이후 1930년대 만주에서 한중연합작전을 주도한다. 1920년대에 활발한 무장투쟁을 한 단체로는 [[김원봉]]이 1919년 만주에서 조직한 [[의열단]]이 대표적이다. 이들은 국내의 경찰서나 관공서, [[동양척식주식회사]] 건물 등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이에 한계를 느끼고 이후 조직적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